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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설화

천마와 아기장수

계양산에서 큰 활기가 서쪽으로 뻗쳐와 형성된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었다.
이 곳에 천마가 살았다는 전설, 그리고 이 산의 남쪽 아래에 아기장수가 태어났었다는 전설이 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산 속에는 양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보인 적은 없었다. 이따금 말 울음 소리가 들리고, 동이 터 오는 새벽 하늘에 날개를 힘차게 저으며 날아가는 말을 멀리서 본 사람은 더러 있었다. 사람들은 구태여 찾아 올라가 천마를 보려 하지 않았다. 호기심 많고 극성스런 청년들이 온 산을 헤매었으나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 때문이었다. 조선 중기, 남쪽 아랫마을에 합천이씨(陜川李氏)가 몇 가구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에서 버섯이나 나물을 캐며 살았다. 이 집안에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건강하고 착했으며 아내도 부지런하고 얌전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부부였으나 결혼 십 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아내가 호랑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꾼 꿈인데다 몽롱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듯한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에 느껴졌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자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새벽에 길몽을 꿨어요. 아기를 가지려나 봐요.”
꿈 내용을 들은 남편은 희색이 만면했다.
“태몽이면 얼마나 좋겠소?”
부부는 마을의 노인들에게 여쭈었다. 모두들 아들을 얻을 좋은 태몽이 라고 했다.
이씨아내는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지냈고 부인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이씨는 아내와 장차 태어날 아기를위하여 열심히 일했고 아내도 길쌈을 그치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 마을 사람들은 천마산 깊은 골짜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었다.
그것은 조용히 새벽공기를 흔들며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을 불안하게하거나 위압하는 소리가 아니라 천상에서 울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고 품격이 높게 느껴지는, 그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상서스러운 소리였다.
그날 낮, 이씨의 아내가 아기를 낳았다.
산파역을 맡은 할머니가 말했다.
“ 고추예요.튼실한고추를달고나왔다구요.”
아기엄마와 아버지는 삼신할머니에게 감사했다.
“ 삼신할머니, 이렇게 튼튼한 아들을 점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기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총명해 보였으며 어깨도 넓었다. 아기의 큰아버지 큰어머니등 일가친척들도 달려와 늦게 아들을 얻은 부부를 축하했다.
아기의 몸을 씻고 배내옷을 입히던 산파할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여기를 좀 봐요. 아기등에 북두칠성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냥 좋은 징조로만 여기고 미소를 교환했다.
아기는 범상하지 않았다. 열흘만에 걸었으며 한달만에 뛰어 다녔다.
그리고 백일이되자 맷돌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몸도 민첩해서 방바닥에서 벽을 타고 달려올라가 천장을 타고 뛰다가 반대편 벽을 타고 뛰어 내려 왔다.
초가지붕위로 휙휙 날아 올랐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천마산 꼭대기로 달려 올라 갔다.
마을 사람들은 경탄 하였다.
“아아, 우리 마을에 아기장수가 태어났구나!”
아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관아에 까지 전해졌다. 고을 사또는 몸소 가마를 타고 마을로 와서 아기를보고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아기장수가 나오면 역적이 되어나라를 해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는 아기장수가 콩을 한줌 뿌리면 그것이 병사가되고 팥을 한줌 뿌리면 그것이 모두 군마가 되어 막강한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다.
그는아기의친척중가장나이가든어른에게말하였다.
“ 아기를 광에 가두어라. 내가 조정에 보고를 하면 조치가 내려질 것이다.
만약 명령대로하지 않으면 너희일가가 능지처참 당할 것이다.”
사또가 돌아간 뒤 아기장수의 부모는 아기를 광에 가두고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때,소문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아기장수를 죽이기 위해 서울에서 관군이 달려 온다는 것이었다
아기장수와 함께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도 들렸다.
아기장수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말 했다.
“ 아기야,나를 용서해라. 네가 관군에게 잡혀 죽고 일가가 몰살 당하느니 너의 목숨을 내가 끊는게 낫다.”
아기장수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 하였다.
“저를 묻을때 콩다섯섬과 팥다섯섬을 같이 묻어 주세요.”
아버지는 아기장수를 다듬잇돌로 눌러죽이고 땅에 묻으며 콩과팥을 함께 묻었다.
이튿날 관군이 도착 했다.
“어서 아기를 내 놓아라.”
아기장수의 집안어른들은 관군장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죽였습니다요. 나라의 역적이 될 것이라고하여 아비가 돌로 눌러 죽이고 묻었습니다요.”
장수는 고개를 끄덕 였다.
“ 나라의 후환을 없애고 우리관군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잘 한일이 도다. 무덤으로 나를 안내하라.”
관군이 무덤에 이르렀을때 놀라운 일이 벌어 졌다. 아기장수가 살아있고, 아기와함께 묻은 콩은군사가 되고 팥은 군마가 되어 막 아기장수를 호위하여 일어 나려는 것 이었다.
관군장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서 진압하라. 어서 저 역적들을 죽여라!”
아기장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왜 나를 역적이라하십니까. 머지않아 조국에 쳐들어 올 적군을 맞아 싸우다 죽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관군은 칼을 내리쳐 아기장수를 죽였다.
그 때 였다. 천마산골짜기에서 천마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흔들며 들려왔다.
관군과 마을 사람들은 분명히 보았다. 천마가 힘차게 날개를 휘저으며 달려와 아기장수의 무덤위를 선회하는 것을. 천마는 한나절 동안 그렇게 하늘을 날며 슬피울다가 땅으로 떨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장수의 무덤옆에 천마를 묻어 주었다.
몇해 뒤, 왜군이 쳐들어 왔다. 조선의 군대는 왜군을 당하지 못해 수 많은 목숨과 조선의 강토가 그들의 발굽에 유린되었다. 사람들은 탄식 하였다.
아기장수가 살아 있었으면 천마를 타고 날아다니며 왜적으로 부터나라를 지켰을 것 이라고.

해설

심곡동이 도시 계획으로 지각(地殼) 전체가 뒤바뀌기전 마을에 말 무덤이 있었다. 지금 한국통신 건물에 인접한 녹성 아파트 자리로 무덤처럼 둔덕이 불룩 솟아 있었고 그 곳을 ‘ 말무덤'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천마의 무덤이라고 여겨왔다. 우리말의 접두사 ‘말'은 크다는 뜻으로도 사용 되었다. 말조개, 말벌이 그 예이며, 큰무덤을 ‘ 말무덤'이라고 부른 예도 많다. 심곡동의 말무덤이‘ 큰무덤'의 뜻이었을 개연성도 있다. 아기장수의 무덤은 전설속에 있을뿐 구체적인 장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마산이 철마산으로 바뀐 것은 강제 합방 직후 일제가 전국을 측량 할 때 이 곳에 온 일본인 측량기사가 ‘천마'를 ‘철마'로 잘 못 듣고 무심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 출처 : 인천서구문화원 향토지①
인천 서구의 설화 <천마와 아기장수 외> - 이원규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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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고사

모월곶, 석곶, 서곶, 객건너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체는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되어 서곶면이 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은 군 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은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천시가 구제(區制)를 변경하여 서곶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에서 서구를 분리할 때, 서곶구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서곶은 ‘서쪽으로 길게 뻗은 해안'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동아출판사가 발행한<국어사전>에 의하면 우리말의‘곶' 또는 ‘고지'는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황해도의 ‘장산곶'이나 경상북도의 ‘장기곶'처럼 지명 뒤에 붙어 바다로 뻗어나간 곳이라는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인천이라는 고유 지명에 ‘곶'자를 붙이면 인천의 한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지칭되는 것인데, 주지하는 바처럼 서곶은 그렇지 않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 땅이름을 나타내는‘곶'자를 차용하는 것이 위의 장산곶이나 장기곶처럼 일반화되어 있다. 8·15 광복 이후 수십 년 간 ‘서곳'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받 침소리ㅈ이 ㅅ으로 대표음화되는 것으로 잘못 유추하였기 때문이다. 중세 국어에는 그런 현상이 있었으나 근대국어의 음운 변화에 따르면 ㅈ은 ㅅ,ㅊ, ㅌ과 더불어 ㄷ으로 대표된다. 1933년에 만들어진 한글맞춤법통일안규정은 받침은 어원을 밝혀 적고, 읽을 때만 대표음화로 하도록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이 잘못된 지명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지명의 오류를 주목한 서곶초등학교(당시는 서곳국민학교였다) 교사들에 의해 정식으로 이의가 제기되어 서곶으 로 고쳐졌다.
언뜻 생각하면서 곶지역은 오늘 인천의 다운타운에서 보면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하므로 이치에 맞지않는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바처럼 이 지역이 부평군에 속해 있던 시기에 부평 중심으로 그렇게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서곶은 지형이 바다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놓인 형상이다. 계양산과 철마산을 품고 있는 원적산맥이 바다를 향해 치맛자락을 늘이며 남북으로 뻗쳐 있기 때문이다. 고려때에는 서곶의 북쪽지역이 황어현에 속했으며, 남쪽지역은 부평현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남쪽과 북쪽이 모두 부평부(富平府)에 속했으며, 오늘의 가정동, 신현동, 석남동, 원창동, 가좌동을 포함하는 남쪽을 석곶면이라하고, 오늘의 백석동, 시천동, 검암동, 경서동, 공촌동, 연희동,심곡동을 포함하는 북쪽을 모월곶면이라 하였다. 이 두면의 경계는 승학현(昇鶴峴.싱아고개라고도한다)을 중심으로 구분 되었다.
모월곶이라는 지명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는데 작은맥이터럭(毛)같이 뻗어내려서 ‘ 터럭이많은 반달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전설을 보면 물이 많은 고장이라 물곶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석곶이라는 지명은 속칭 돌곶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곳의 지형이 꼬챙이 같이 길게 뻗어있으며돌이 많다고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돌곶이가 어디인가는 한 장소를 잡아지칭하기는 어렵다.
대체로보아 가좌동, 원창동, 가정동의 해안이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곶이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조선중기의 기록이 보인다. 숙종36년(1710) 금위영제조(禁衛營堤調) 민진후(閔鎭厚)가 품계 하였다.
“수도 한양의 먼방위를 강화덕진과 영종진이 맡고 있으나 유사시에 두곳이 동시에 공격당하면 한양도성이 위태로워지니 길목인 석곶에 군대를 주둔해야 합니다.”
그의 뜻대로 석곶에 방어진이 설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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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고사

계양산에 매사냥 온 충렬왕과 제국공주

고려 충렬왕은 태자 시절을 몽고에서 보내면서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 계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公主) 공주와 결혼했으며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고려에서는 몽고 공주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라고 불렀다.
또는 줄여서 제국공주라고도 했다.원나라와의 왕실 혼인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양국의 우호관계를 튼튼히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권신들의 세력에 억눌려오던 왕 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등이 퍼지게 되었다. 충렬왕 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려 때에는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특히 충렬왕은 몽고에서부터 매사냥을즐겨한 터라 그것을 하고 싶어 못견뎌했다. 국영 매방[鷹房]이 서울인 개경에 있었다.
그런데 사육하는 매가 민가의 닭이나 오리를 공격하여 피해가 커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왕은 응방 책임자였던 이탁(李擢)에게 명령하였다.
“네가 좋은 매방 자리를 찾아 보아라. 나는 매사냥을 못하면 살 수가 없느니라.”이탁은 머리를 조아렸다.
“꼭 좋은 매방 자리를 찾겠사옵니다.”그는 부하 박향(朴鄕), 윤수(尹秀)와 함께 장소를 물색하던 중 부평 계양산의 큰 고개까지 왔다.
“ 여기에 꿩과 산비둘기가 지천으로 많지 않느냐? 산아래로는 서해도 보이고 얼마나 좋으냐?”
이탁의 말에 두명의 부하도 동의 했다.
“ 그렇습니다.전하께서몹시좋아하실것입니다.”
충렬왕은 보고를 받고 몹시 기뻐했다.
“ 바다가 보이고 경관도 좋고 산도 좋고 사냥감도 많단 말이지?”
“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럼 당장 거기에 매방을 만들거라.”
왕이 명령 했다.
그리하여 몇달만에 계양산에 국영 매방이 생겼다. 왕은 다섯차례에 걸쳐 이곳을 다녀갔다.
어느 해가을 ,왕은 왕비인 제국공주를 동반하였는데 왕비는 사냥을 싫어 하였다.
그런데도 따라나선것은 왕이 후궁 무비를 총애하는 것이 싫어서 였다.
임진강을 건너고 김포통진에 도착해 하루를 묵었는데 제국공주는 숙식이 불편하다며 노여움을 터뜨렸다.
“ 전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임무인데 어찌 사냥만을 즐기십니까. 그리고 왜 나를 이 불편한 곳까지 데려와 고생 시킵니까.”
왕은 말한마디도 못하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경명현에 도착하고서도 왕비는 매방책임자 윤수를 꾸짖었다.
“이곳에는 꿩은 커녕 거위 한마리 없는데 왜 전하에게 사냥을 권하여 나까지 험한길 을 오게한 것이냐?”
그리고 충렬왕에게 또 다시 쏘아 붙였다.
“ 전하가 사냥꾼 두목입니까? 왜 제왕이 왕도를 놓아 두고 이런데 나온단 말입니까?”
충렬왕은 분하여 서리가 하얗게 깔린 풀밭에 그냥 주저 앉았다.
“ 그래도 내가 고려땅에서는 제왕인데 공주는 말을 함부로 합니까?”
“ 왕비가 왕을 걱정하고 나라를 걱정하 는말을 함부로하는 말이라고한다면 나는 이 나라에서 살지 못합니다.” 걸핏하면 제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협박하는 제국공주 앞에서 충렬왕은 힘이 없었다.
공주가 돌아가면 원나라 황제는 책임을 물어 자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거나, 군대를 보내 제압 할 것 이었다. 왕은 묵묵히 앉아서 풀밭을 들여다 보았다.
충렬왕은 제국공주와 충돌하면서도 그 뒤에도 기어이 계양산에 왔다. 그는 오랫동안 몽고에서 지내말을 잘탔는데 그래서 때로는 말을 몰고 달리 며활을 쏘아 노루와 멧돼지도 잡았다.
그리고 이 곳을 자랑스러워해서 원나라 사신을 동반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지명 계양을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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