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곶의 지명유래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역은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곳이 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해 서곶면이라 하였다. 지명은 군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이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으므로 인천시가 구제를 변경하여 서곶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에서 서구를 분리할 때, 서곶구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서곶은‘서쪽으로 길게 뻗은 해안’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동아출판사가 발행한 국어사전에 의하면 우리말의 ‘곶’ 또는 ‘고지’는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 검암동 (黔岩洞)
- 검암이란 검은 바위를 뜻함. 현 서인천고등학교 담장 옆에 둘레 20여미터의 검은 바위가 있다. 원래 부천군 서곶면 검암리임. 부평군 모월곶면과 통합하여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다가 해방후 검안동으로 개칭되었다. 1977년 백암, 여천동을 흡수 확장 하였음.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예부터 검암, 간개발, 시내, 점말등의 소규모 촌락이 산재되어 있고, 현재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한창이다.
- 백석동 (白石洞)
- 백석동이란 백석동 (뒷산의 주봉이 흰돌로 이루어진 데서 생긴 이름. 옛 부평군 석곶면 백석리임. 1914년 부평군 모월곶면과 통합하여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으나, 1940년 인천부에 편입 운양정이 되었고 1946 다시 옛이름인 백석동이 되었다.
- 시천동 (始川洞)
- 시천동은 예부터 계양산 계곡에서 흐른 물이 시내를 형성 시냇물이 시작되는 곳이란 뜻에서 생긴이름. 지금도 “시천”이란 하천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부평군 석곶면 백석리 였으나, 1914년 부평군 모월곶면과 통합하여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고,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춘일정이 되었다. 1946년 시천동이 됨.
- 경서동 (景西洞)
- 경서동이란 경명현(징쟁이 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 원래 부평군 석곶면 고잔리임. 1914년에 부평군 모월곶면과 통합하여 석곶면에 속했으며,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이가정이 되었고 1946년에 경서동이 되었다. 서해안 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염전이 많이 생겼으며 청라도, 난지도, 소문점도, 사도와 같이 여러섬이 속해 있었다. 그러나 1986년후 요도와 이도, 묘도를 연결하는 대간척사업이 완성되므로서 약 천만평의 새로운 땅이 생기고 여러섬이 육지가 되었다.
- 연희동 (蓮喜洞)
- 신라시대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을 모시는 여자들을 이곳에 데려와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고해서 연희동이라 불러지게 됨. 원래 부평군 석곶면 연희, 공촌, 심곡리였으나, 1914년대에 부평군 모월곶면과 통합하여 부천군의 서곶면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인천부로 편입되어 연희라는 정상정, 공촌리는 흑전정, 심곡리는 일진정으로 되었다. 1977년 3개동이 통합되어 연희동이 됨. 이 고장은 순수한 농촌지역으로 “양가말”. “뒷골”, “사동”과 같이 촌락으로 이루어져 법정동인 심곡동, 공촌동을 관장하고 있다. 또한 현재 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었고 구청 , 경찰서 , 소방서 , 공무원교육원 , 우체국 , 전화국등 각종 관공서가 위치하고 있어 서구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 심곡동 (深谷洞)
- 심곡동이란 산계곡이 깊은 곳에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 구한말 석곶면 연곡리 였으나 1914년 부평군 모월곶면과 통합하여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다. 1940년 인천부에 일진정이 되었으나 1946년 심곡동이 되었으며 행정동인 연희동에 속해있다.
- 공촌동 (公村洞)
- 옛날에는 고현지(삼구시대 계양산 기슭 “갈뫼산”밑이 동현이 있던 마을)라고 불리운 곳으로 백제시대부터 부평읍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로 구한말에는 부평군 석곶면 공촌리였음. 1914년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이 통하여 부천군 서곶면에 속했음. 1940년 인천에 편입되어 흑전정이 되었고, 1946년 옛이름을 따서 공촌동이 되었으며 행정동인 연희동에 속해있다.
- 청라동 (靑羅洞)
- 청라지구 서해안쪽에 조그마한 섬(해발 67.7m, 해안선 길이 5km, 면적 0.79㎢)이 있었는데 푸른 넝쿨과 관목들이 무수히 많아 푸른섬이라는 뜻으로 “청라도(靑羅島)”라 불이었다 하며, 서곶 주민들이 청라도가 유난히 푸른색으로 보이기 때문에 파란섬이라는 뜻으로 “파렴”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가정동 (佳亭洞)
- 가정동이란 조선시대 개국공신 부여군 조반이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짓던 별장인 가정터가 있던 곳이란 뜻에서 생긴이름. 구한말 부평군 석곶면 가정리였음. 1914년 부천군 서곶면과 통합. 부천군 서곶면에 속했으나 1940년 인천부에 편성되어 천대전정이 되었고 해방후 가정동이 되었으며 “윗말”, “아랫말”, “돌록골”, “상아고개”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이곳에는 6.25때 우리나라에 참전한 콜럼비아군의 참전을 기념하는 참전비가 있으며,지금은 가정1,2,3동의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신현동 (新峴洞)
- 신현동은 “새고개”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 구한말 부평군 모월곶면 신현리였으나, 1914년 부평군 서곶과 통합되어 부천군서곶면이 되었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현무정이라 불리어지다 1946년말 다시 신현동이 되었으며 “새고개”, “구석말”, “양금말”, “요골”, “가운데말”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 원창동 (元倉洞)
- 원창동이란 삼남의 세곡을 서울로 수송하기 위하여 모아두는 전조창이 있던 곳이란 뜻에서 원창동이란 이름이 생겼다. 원래 부평군 모월곶면과 포리였다. 1914년에 부평군 석곶면과 통합되어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다. 16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어 구수정이 되었다. 1946년에 “갯말”, “한적골”, “창고말”과 같이 자연부락이 있다.
- 석남동 (石南洞)
- 원래 부평군 모월곶면 고잔리, 가정리, 신현리였으나, 19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석남리는 촌상정으로, 가정리는 천대전정으로, 신현리는 현무정으로 되었으며, 1977년 석남, 가정, 신현동 (일부가 통합되어 석남동이 되었다. 이고장은 “봉우재”, “번지지”, “가정”, “고잔”, 웃우물”등이 있다. 특히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급격히 발전 새로운 도시로 변모하고 있으며, 지금은 석남1,2,3동의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가좌동 (佳佐洞)
- 속칭 “개건너” 지역인 가좌동은 부평군 모월곶면 가좌리로 1914년 부평군 석곶면과 통합되어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천간정이 되었으며, 1946년 가좌동이 되었다. “가마굴”, “능안”, “건지골”, “살구지”, “네집네” 같은 자연부락이 있으며 가좌1,2,3동의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검단동 (黔丹洞)
- 고려때는 김포현, 조선조 태종14년(1414)8월에는 개칭된 금양현에 동년 10월에는 다시 김포현에 속했다가 인조 10년(1632) 금릉군으로 개칭될 때 금릉군에, 조선조말 김포현에서 김포군으로 개칭된 뒤부터 현재까지 김포군에 속해있다가 행정구역 통·폐합전, 검단면에 3개면으로 분구되었으나, 1914년 노장면(원당,당하), 마산면(마전,불로,대곡), 검단면(금릉,오류,왕길)등 3개면을 합병하여 검단면으로 칭하게 되었다. 黔자는 “검다”의 뜻. 단(丹)자는 “붉다”는 뜻으로 본면의 서해안 일대가 개펄로 되어 있어 “검다”의 의미로 “黔”자를 “검단”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하여 지며, 95년 3월 1일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광역시 서구로 통합되면서 검단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마전동, 당하동,원당동,불로동,대곡동,금곡동,오류동,왕길동의 8개의 법정동으로 이뤄졌다.
- 마전동 (麻田洞)
- 조선조 말까지 마산면(馬山面)이었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서 삼을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마전(麻田)’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검단동의 소재지로 각종 행정기관 및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다.
- 당하동 (堂下洞)
- 옛날에 제림산에 당(堂)이 있었고 당 아래 부락이 위치하였다 하여 ‘당하(堂下)’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원당동 (元堂洞)
- 조선초 초기에 이 마을에 원당(元堂)이라는 당이 있었기 때문에 행정구역명을 ‘원당’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일설에는 옛 북성산 밑이라 산림이 울창하여 수목이 풍부하였으므로 이 곳에서 생산되는 좋은 목재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원당’이라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 불로동 (不老洞)
- 조선조 말에는 마산면(馬山面)에 속한 마을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동네 앞산인 만수산(萬壽山)에 산삼을 비롯한 각종 약초가 많아 어느 노인이 이 산에 올라 부지중에 산삼과 약초를 채취하여 나물로 먹은 후부터는 장수하였다 하며, 그후부터 만수산에 불로초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로초를 캐러 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을 ‘불로(不老)’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매리와 목지리를 병합하여 불로리라 해서 검단면에 편입되었다.
- 대곡동 (大谷洞)
- 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한골, 황골, 황곡 또는 ‘대곡(大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사자족애(獅子足艾, 약쑥)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고려시대에 중국과 무역을 하는데 그 당시는 물물교환이 보통이었다. 중국에서는 한약재와 도자기, 고려에서는 화문석과 인삼을 주요 품목으로 교환하였다. 특히 강화와 김포에서는 고려 최고의 품질로 약효과 뛰어난 약쑥(艾)이 서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었는데 특히 서곶(西串) 일대의 것이 좋았다 한다. 지금도 ‘쑥당이’ 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서동(景西洞)의 옛 이름이다. 쑥은 5월 단오를 전후하여 약 1개월간 경기도에서 나오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약종 상인들이 계양의 황해장(黃海場)터에서 수납하고 다시 국제간의 거래는 발아시장(發阿市場, 현 검안동소재)에서 이루어져있다. 그때 주막집이 많은 옛 상두산을 歌絃山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역상인들의 유숙은 여인숙이 많은 큰 골짜기 동네에서 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곳이 바로 ‘대곡’이었다고 전한다. 현재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서해일대(서곶과 안동포)의 것을 제일 가는 약애(藥艾, 약쑥)로 친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두곡리를 병합하여 대곡리라 해서 검단면에 편입됨.
- 금곡동 (金谷洞)
- 옛날 풍수지리학자가 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마을 뒷산에 쇳돌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 후부터 ‘금곡리’라 했다고 전하여 진다.
이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 말까지 금을 채굴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많은 철을 채광한 바있다. 금곡리 산200번지 일대가 그 자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신리, 좌동을 병합하여 금곡리라 했다.
- 오류동 (梧柳洞)
- 조선조 중엽 이전, 이 마을에는 오동나무숲이 많았으며, 그 옆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이들 나무 이름을 따서 ‘오류리’라 칭하였다고 전하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반월촌, 봉화촌, 대촌을 병합하여 오류리라고 했다.
- 왕길동 (旺吉洞)
- 조선조 중엽에 어느 풍류객이 이 마을을 '旺 吉'이라고 작명하여야 이 마을에 덕(德)이 있고 생활이 풍요로울 것이라고 하여 '왕길' 마을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왕길또는 외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소왕길리, 안동포, 동사곶리를 병합하여 왕길리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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