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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백리- (황희)

  • 작성자
    (감사실)
    작성일
    2014년 5월 26일(월) 11:03:47
    조회수
    1928

황희(黃喜, 1363~1452)

 

황희는 공민왕 12년(1363년)에 개성에서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 때인 우왕 2년(1376년)에 음직으로 복안궁 녹사가 되었고, 스물한 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곧이어 진사시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다가, 창왕 원년(1389년)에 성균관 학관으로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점차 왕의 신뢰를 쌓아갔는데, 그는 중추원을 없애 병제를 일원화하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면서 태종의 신임을 받게되었다. 이후 태종은 모든 정사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 유배 생활

황희가 이조판서로 있던 태종 18년(14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지금의 파주인 교하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했다.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황희는 세종 4년에야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나서 의정부 참찬에 등용되는데, 이때 황희의 나이는 60세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었다. 그 후 황희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고 69세 되던 해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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