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월곶, 석곶, 서곶, 개건너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체는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되어 서곶면이 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은 군 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은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천시가 구제(區制)를 변경하여 서곶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에서 서구를 분리할 때, 서곶구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서곶은 ‘서쪽으로 길게 뻗은 해안'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동아출판사가 발행한[국어사전]에 의하면 우리말의‘곶' 또는 ‘고지'는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황해도의 ‘장산곶'이나 경상북도의 ‘장기곶'처럼 지명 뒤에 붙어 바다로 뻗어나간 곳이라는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인천이라는 고유 지명에 ‘곶'자를 붙이면 인천의 한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지칭되는 것인데, 주지하는 바처럼 서곶은 그렇지 않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 땅이름을 나타내는‘곶'자를 차용하는 것이 위의 장산곶이나 장기곶처럼 일반화되어 있다. 8·15 광복 이후 수십 년 간 ‘서곳'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받 침소리ㅈ이 ㅅ으로 대표음화되는 것으로 잘못 유추하였기 때문이다. 중세 국어에는 그런 현상이 있었으나 근대국어의 음운 변화에 따르면 ㅈ은 ㅅ,ㅊ, ㅌ과 더불어 ㄷ으로 대표된다. 1933년에 만들어진 한글맞춤법통일안규정은 받침은 어원을 밝혀 적고, 읽을 때만 대표음화로 하도록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이 잘못된 지명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지명의 오류를 주목한 서곶초등학교(당시는 서곳국민학교였다) 교사들에 의해 정식으로 이의가 제기되어 서곶으 로 고쳐졌다.
언뜻 생각하면서 곶지역은 오늘 인천의 다운타운에서 보면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하므로 이치에 맞지않는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바처럼 이 지역이 부평군에 속해 있던 시기에 부평 중심으로 그렇게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서곶은 지형이 바다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놓인 형상이다. 계양산과 철마산을 품고 있는 원적산맥이 바다를 향해 치맛자락을 늘이며 남북으로 뻗쳐 있기 때문이다. 고려때에는 서곶의 북쪽지역이 황어현에 속했으며, 남쪽지역은 부평현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남쪽과 북쪽이 모두 부평부(富平府)에 속했으며, 오늘의 가정동, 신현동, 석남동, 원창동, 가좌동을 포함하는 남쪽을 석곶면이라하고, 오늘의 백석동, 시천동, 검암동, 경서동, 공촌동, 연희동,심곡동을 포함하는 북쪽을 모월곶면이라 하였다. 이 두면의 경계는 승학현(昇鶴峴.싱아고개라고도한다)을 중심으로 구분 되었다.
모월곶이라는 지명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는데 작은맥이터럭(毛)같이 뻗어내려서 ‘ 터럭이많은 반달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전설을 보면 물이 많은 고장이라 물곶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석곶이라는 지명은 속칭 돌곶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곳의 지형이 꼬챙이 같이 길게 뻗어있으며돌이 많다고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돌곶이가 어디인가는 한 장소를 잡아지칭하기는 어렵다.
대체로보아 가좌동, 원창동, 가정동의 해안이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곶이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조선중기의 기록이 보인다. 숙종36년(1710) 금위영제조(禁衛營堤調) 민진후(閔鎭厚)가 품계 하였다.
“수도 한양의 먼방위를 강화덕진과 영종진이 맡고 있으나 유사시에 두곳이 동시에 공격당하면 한양도성이 위태로워지니 길목인 석곶에 군대를 주둔해야 합니다.”
그의 뜻대로 석곶에 방어진이 설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