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伯倫(한백륜)은 朝鮮廟(조선묘) 世宗9年(1427. 7. 4)에 誕生(탄생) 成宗5年(1474. 5. 3) 享年(향년) 48歲(세)에 逝去(서거)하였으며, 字(자)는 子厚(자후)요, 號(호)는 毅菴(의암), 本貫(본관)은 淸州(청주), 諡(시)는 襄惠(양혜)이며 淸州韓씨(청주한씨) 襄惠公派(양혜공파) 始祖(시조)이다.
朝鮮廟(조선묘) 제8대 睿宗大王(예종대왕)의 妃(비) 安順王后(안순왕후)의 아버지로서 淸川府院君(청천부원군)에 封(봉)해졌으며 세종28년(1446년) 겨울 弱冠(약관) 19세에 官職(관직)에 出仕(출사) 五衛都摠管(오위도총관)등 要職(요직)을 거쳐 성종원년(1470년)에 議政府(의정부) 右議政(우의정) 겸 領經筵事(영경연사) 감춘추관사에 除授(제수)되었다.
奉職(봉직)하는 동안 2차에 鐵券敎書(철권교서)를 받는등 文武(문무)를 겸비한 忠直(충직)한 功臣(공신)으로 外戚(외척)의 近臣(근신)이라는 汚名(오명)을 씻고자 여러차례 官職(관직) 辭任(사임)을 奏請(주청)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陞差(승차)시켜 保國(보국)토록 하였다. 또한 살고 있는 집이 너무 낡고 陋醜(누추)하여 친구들이 改修(개수)하도록 請(청)하니 웃으면서 “先人(선인)께서 물려준 것으로 비바람만 가리면 足(족)하네” 하며 淸貧(청빈)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다.
-묘지명게재-
예종원년(1469. 5. 20)에 내려진 鐵券(철권) 爵號(작호)는 推忠定難翊戴功臣輔國崇祿大夫淸川君五衛都摠府都摠管(추충정난익대공신보국숭록대부청천군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稱(칭)하고 성종원년(1470. 4. 6)에 大匡輔國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淸川府院君(대광보국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청천부원군)으로 重用(중용)되며, 성종2년(1471. 3. 27)에 純誠明亮經濟佐理二等功臣(순성명량경제좌리이등공신)으로 冊祿(책록)되는 2차의 鐵券敎書(철권교서)가 내려진다.
- 조선왕조실록 게재 -
韓伯倫(한백륜)은 溫和(온화)하고 謙遜(겸손)한 性品(성품)을 지닌 朝鮮朝(조선조) 前期(전기)에 淸白(청백)한 忠臣(충신)으로 當代(당대) 名望家(명망가)인 鄭麟趾(정인지), 韓明澮(한명회), 申叔舟(신숙주)등과 國政(국정)에 참여하다 薨(훙)하니 高陽郡(고양군)에 禮葬(예장) 되었던 配位西河府夫人(배위서하부부인) 豊川(풍천) 任(임)씨(1472. 5. 8서거)와 함께 이 墓域(묘역)에 安葬(안장)되었다. 그 時代(시대)를 잘 描寫(묘사)한 5편의 靑蓋瓦(청개와)로 된 墓誌銘(묘지명, 1981년 발굴)에 韓伯倫(한백륜)의 淸廉潔白(청렴결백)과 獻身的인 爲國忠節(위국충절)의 정신이 잘 새겨져 있어 후세들에게 많은 龜鑑(귀감)이 되고 있다.
墓域(묘역) 안에는 그 당시 三絶(삼절)이라 부르고 世祖實錄(세조실록)과 睿宗實錄(예종실록) 편찬에 크게 기여한 文臣(문신) 金紐(김뉴)가 지은 神道碑(신도비)와 그 외 墓碑(묘비)등 敷石物(부석물)이 있다.
지금 이곳 마을을 陵安(능안)골이라고 부르는데 韓伯倫(한백륜)의 墓(묘)가 陵(능)과 같이 크다하여 陵(능)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命名(명명)되어 전해오고 있다 한다. 묘 진입로에는 묘 안내표지석(案內標識石)이 세워져있다.
주소(위치) : 인천광역시 서구 마전동 산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