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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암에 들어섰던 황해사(黃海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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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검암리에 2층 건물이 들어서고 황해사라는 간판이 걸렸다. 일본의 토지 자본가들이 만주 땅의 개척과 매입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이 회사는 한반도 서해안의 간척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검암리에 간판을 건 것은 송병준의 한들방죽이 성공해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온 것을 본 직후였다.
이 회사는 썰물 때 훤하게 드러나는 갯벌을 논으로 만들기 위해 청라도까지 둑을 쌓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내부 사정 때문인지 실제로 일을 착수하지도 않은 채 그 건물은 비워졌다.
황해사가 눈독을 들였던 그 갯벌은 결국 80년이 지나 동아개발이 매립에 성공했다.”
2004년도에 간행된 첫 『서구사』의 기록으로 검암동의 일화(逸話)를 소개하는 한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이 구절만으로도 당시 일본인들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토지 침탈에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는데, 그 한 예가 바로 검암리에 등장한 황해사이기도 한 것이다.
황해사는 당시 경성부 영정(榮町), 곧 용산구 신계동 6번지에 본점을 두고 인천에도는데, 1921년도 자료를 보면 사업목적이 “조선 및 만주 시베리아, 중국 청도에 있는 농사 경영 및 식림. 신탁업, 광산업, 전기 사업 경영 및 토지 매매 및 중개업. 전 항의 사업을 조성하기 위한 측량, 설계, 청부, 기타 부대사업”으로 되어 있을 만큼 토지 관련 사업을 주로 하는 전문 회사였던 것이다.
특히 1921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황해사 사장 송산(松山常次郞)은 인천 앞바다의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조력발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 사업은 경비 문제 등으로 실현에 옮기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나, 이밖에도 부천, 김포에 연한 부평평야 3500정보에 대한 수리사업을 위해 그 측량을 맡는 등 인천 인근에서의 사업에도 열을 올린 것을 알 수 있다. 『서구사』에는 기록이 없지만, 2004년 시립박물관에서 행한 인천북부종합학술조사에 의하면 황해사가 시천동 164번지, 시천천 하류 일대를 간척해서 관리했다는 조사 기록도 보인다.
사진은 황해사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大救), 용연(龍淵) 2개 면(面)의 임야 개간권을 총독부로부터 대부받은 황해사가 토지 연고자들에 대해 협박 또는 농락을 일삼으면서 연고권 매수 대금을 1년 이상 지불하지 않고 있어 원성이 자자하다는 신문 기사 제목이다. 황해사는 이런 식의 야비한 행태를 여러 곳에서 드러내기도 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송병준이 국유미간지 개간이라는 미명으로 한들방죽을 개간한 전례를 보고 검암리와 청라도를 잇는 갯벌에 둑을 쌓고 간척을 통해 그 갯벌을 논으로 만들려던 계획을 가지고 달려들었던 황해사가 슬며시 꼬리를 감춘 것은 실제로 ‘내부 사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보다 알짜배기 노른자위 사업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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