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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서구 4월호(244호)

  • 제목
    징맹이고개를 찾아서
  • 작성부서
    홍보팀
    작성일
    2017-03-27
    조회수
    455

 
징맹이고개를 찾아서
 
 
 
수리 떴다 병아리 감춰라
요즘은 어떤가 모르지만, 예전엔 이맘때면 초등학교 앞에 햇병아리 장사가 나타나 아이들을 노랗게 유혹하곤 했다. 감별사가 암컷을 고르고 버려지는 수컷들이라 코 묻은 돈으로도 살 수 있을 만큼 가격이 헐했다. 새 학년이 되면 집집마다 한동안 삐약삐약 사랑스런 소음이 흘러나왔다. 급한 대로 쌀집에서 좁쌀을 구해와 먹이다 보니 이내 항문이 막힌 병아리는 며칠 못 살고 죽어나갔다. 아이들은 눈물바람을 하며 꽃삽을 들고 나와 묻어주고, 앞으로 다시는 병아리 사오지 말라고 종주먹을 대는 엄마가 종종 눈에 띄곤 했다.
그보다 더 먼 시절에는 아이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합창했다.
수리 떴다 병아리 감춰라, 수리 떴다 병아리 감춰라…….”
하늘 높이 떠서 마을을 선회하는 독수리에게 텃밭에서 종종대는 햇병아리는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먹잇감이었다. 하늘에 검은 점이 뜨고 그 그림자가 땅바닥을 오락가락하면 아이들은 손나팔을 하고 입을 모아 수리 떴다 병아리 감춰라.’를 외치며 병아리들을 닭장으로 몰았다. 가끔은 미끄러지듯 스쳐간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는 일도 일어났다. 독수리는 날짐승의 왕으로 어린아이를 채서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좋다고 알려졌기에 수리가 뜨면 재빨리 병아리를 감춘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 가쁜 숨을 쉬며 수리가 멀리 날아가기만 기다렸다.
우리 고장 징맹이고개를 찾아 나서면서 수리가 떠오른 건 그곳이 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징맹이고개
 
지금은 8차선 경명대로가 시원하게 뚫린 고갯길이지만 징맹이고개란 옛 이름이 정다워 계속 관심이 갔다. 서구 공촌동에서 계양구 계산동으로 넘어가는 계양산 고개가 예전에는 경명현, 징맹이고개, 혹은 징매이고개로 불렸다 한다. 이 고개에 고려시대 응방이 있었고, 충렬왕(1236~1308)이 여기서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의 응방은 설치했다 없앴다 다시 설치하기를 반복하면서 조선조까지 귀족스포츠로 존속했다.
1750년경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경명현의 지리적 입지, 세곡의 운송과 보호를 위해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준다. 고려의 수도 송도로 통한다는 점 역시 중요했다. 고려 임금의 사냥터가 되기 위해서는 개경과 부평을 잇는 교통로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경명현은 18세기 후반까지 그 길목으로 지리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1973년 편찬한 인천시사에도 경명현에 대한 우리식 지명이 등장한다. “부평 구읍에서 계양산 서쪽 기슭을 우회하는 거의 8km에 달하는 긴 고개가 있다. 속칭 질맹이고개라고도 하는 이 고개는 인천 근방에서 가장 높고 긴 고갯길인데 이곳을 경명현이라 부른다. 이 경명현은 지금도 원시 모습 그대로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는 곳인데 여기에는 예부터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고 소개한다. 질맹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지만 의미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다만 도적이 집단으로 출몰할 만큼 지세가 험하고 숲이 무성한 형상이라고 전하고 있는 정도다.
서구의 향토사가 이훈익의 인천지방향토사담에도 등장한다. ‘경명현의 원래 명은 속칭 경매이고개 또는 징매이고개라 불리었으니 경매란 매를 경주시켰다는 뜻이고 징매이고개란 매를 징발하였다는 뜻인데 이 고개를 한문으로 경명(景明)이라 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고려 충렬왕은 왕비인 제국공주와 더불어 원나라의 칙사 다루가치들과 함께 계양산에 와서 매사냥을 즐겼다 한다. ……충렬왕은 부평골에서 다섯 번에 걸쳐 매사냥을 하였다고 하며, 고려 때의 국영매방이 경명현(景明峴) 서쪽에 있었다. 충렬왕이 부평 땅에서 매사냥을 한 것도 매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은 그때 부평의 지명이 계양이었던 것을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키고 자기가 죽으면 길주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까지 하였다고 한다.’고 서술했다. 이훈익은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부평지역에 있던 응방(鷹坊, 매방)의 존재와 충렬왕의 매사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응방이란?
응방은 매의 사육과 사냥을 맡아보던 관아로, 고려 때 중국 원나라에 매를 바치기 위해 설치했다. 우리나라에 응방이 처음 설치된 때는 1275(충렬왕 1)이다. 원래 매사냥은 수렵과 목축을 업으로 하는 북방 민족과 중국 대륙에서 일찍부터 행해졌다. 특히 매사냥을 즐긴 몽고인들에게 매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응방 제도는 몽골에서 들어와 그들이 조공품으로 요구하는 해동청(海東靑, 사냥매)을 잡고 길러서 몽골에 보내기 위해 설치되었다. 고려에서는 응방을 경영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기술자인 응방자를 불러오고, 지방의 응방에는 응방심검별감(鷹坊審檢別監)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매 잡는 일을 독려하고, 몽골에서는 매를 빨리 보내라고 착응사(捉鷹使)를 보내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매를 보내라는 요구가 잦자 1283(충렬왕 9)에는 응방을 관장하는 응방도감을 두기도 하였다. 응방에서 길들인 매는 몽골뿐만 아니라 고려의 왕에게도 바쳐 매의 수요는 늘어만 갔고, 응방에 속한 관원들은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횡포가 극심해졌다. 결국 응방은 부패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의 매사냥은 고조선시대 만주 동북지방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숙신족(肅愼族) 때부터 전해져 내려와 그 이후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에 매사냥이 성행했다. 매사냥 기술은 나중에 중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일본에도 백제인들이 전승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충렬왕은 응방(鷹坊)이라는 관청까지 따로 두면서 매에 대한 애착을 보였고, 조선시대에도 응방제도를 계승하여 궁에 내응방을 설치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매사냥은 매를 잡는 게 아니라 길들인 매로 꿩이나 토끼 등을 사냥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독수리와 매도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매는 독수리보다 작다. 독수리는 기류를 타고 날아 날갯짓을 않는데 매는 기류를 타지 않아 날갯짓으로만 난다. 그럼에도 독수리보다 1.7배 빠른 속도로 최대시속 300km까지 난다. 또한 독수리는 배가 고프면 사체도 먹지만 매는 살아 있는 동물만 잡아먹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매는 거저먹지 않으면서 신선한 식사를 하는 양반이라는 얘기다. 덩치가 큰 독수리보다 웃질이라는 얘기다. 그런 매를 길들여 사냥에 나서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옛날 사람들이 낭만에 대해 더 집착하지 않았나 싶다.
민요가수 김세레나의 노래 중에 남한산성이 있다. 그 노래 가사에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가 등장한다. 그 이름들이 매의 이름이란 것도 이번에 알았다. 보라매는 부화해 1년이 안 된 새끼 매를 말한다. 보라매로 들어와 1년간 사람 손에 난 매는 수진이라 한다. 산진이는 야생에서 1년 이상 자란 매를 말한다. 보라매와 산진이의 구분은 털 무늬를 보고 안다. 보라매는 죽엽같이 털 무늬가 아래로 향하나 산진이는 무늬가 가로로 생긴다. 그리고 송골매나 해동청은 사냥용 매를 총칭하는 거였다. 남한산성이란 민요에 각종 매 이름이 등장하는 걸 보면 매사냥과 무관하지 않은 지역인가보다.
그런데 막상 찾아온 징맹이고개엔 응방의 흔적도 그 많던 매도 보이지 않았다. 임꺽정의 전설도 깃들었다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500년 전 계양산에 쩌렁쩌렁 울리던 백정 출신의 의적, 존재만으로도 부모에게 걱정덩어리라 이름마저 걱정이 되었다는 임꺽정이 머물던 곳. 산세가 험한 탓에 이런저런 산적이 많아 백 명, 혹은 천 명이 모여서 넘어야 안전하다 해서 백명고개’ ‘천명고개로도 불렸다는 징맹이고개. 이젠 여인네 혼자서도 거뜬히 넘을 수 있는 안전한 고개. 낮아진 고개가 왠지 허무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흔적 없는 응방 대신 다른 흔적이라도 보아야겠기에 중심성으로 향했다. 무너진 성의 잔해라도 보기 위해 걸음을 놓았다.
 
마음이 구르는 중심성
 
중심성은 1883(고종 20) 가을, 부평부사 박희방이 계양산 경명현에 축조한 성곽이다. 성의 이름을 衆心(여러 사람의 마음)이라 한 것은 주민들의 협조와 의연금으로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중심성이 위치한 경명현(징맹이고개)은 서해의 관문으로 교통과 군사상 요지였으며 한양으로 통하는 전방위적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중심성은 서쪽으로 해안선이 넓게 조망되고 동쪽으로 인천시내와 한강 하류가 보여 서해를 관측하고 방어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고 한다.
중심성지가 서구 공촌동 산1번지 일원에 위치한다는 정보를 되새기며 경명대로 정상 생태통로에서 계양산으로 접어들었다. 산을 오르는 중 간간이 등산객들과 마주쳤다. 그들에게 중심성터가 어디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건 눈에 띄는 흔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절망감이 들었으나 이왕 나선 길, 동물적인 촉을 세웠다. 중심성지는 등산로에서 벗어난 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노란 표지판 앞에서 멈췄다. ‘국가지점번호 다사3001, 5016’ 지점이었다. 여기서 피고개 쪽을 버리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피고개 방향보다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중간쯤 올라가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등산로를 버리고 오른쪽 숲으로 들어섰다. 길 없는 산비탈이 위태로웠다.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붙들고 조금 더 진행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산 위에서 흘러내린 돌들이 밭을 이루고 아래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산중턱부터 시작해 보이지 않는 저 밑까지 10미터쯤 되는 일정한 너비로 돌들이 널려 있었다. 성곽의 흔적은 외통수가 아니었다. 5미터쯤 거리를 두고 또 하나의 돌밭이 같은 형태로 흐르고 있었다. 성곽의 흔적은 두 겹이었다.
여길 처음 왔는데, 일상처럼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못 찾은 중심성터를 단번에 찾아내다니!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분명 골짜기는 아닌데 돌들이 그렇게 흘러내려가니 돌의 계곡처럼 보였다. 산비탈을 구르는 수많은 돌들이 역할을 다하고 세월과 함께 무너져, 이제 그만 주민들이 있는 마을을 향해 와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성의 잔해치고는 방대한 양의 돌이었다. 계를 탄 듯 뿌듯한 심정으로 하산했다.
 
연둣빛 호흡
 
계산동에서 올라왔으니 공촌동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징맹이고개 생태통로를 내려와 서구 쪽으로 걸었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멀어지는 징맹이고개를 눈에 담았다. 험준하고 높았던 고개는 만만하게 낮아지고, 하늘을 마음껏 날던 매들은 사라지고, 응방은 어디쯤 있었는지 알 길 없는데, 시원하게 뚫린 8차선도로로 내리쏘는 차들이 무섭게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래도 이 고갯길을 걸어 내려오길 참 잘했다. 주변을 살펴보며 천천히 내려오다 오른쪽 길가에서 뜻밖의 선물, 공촌천 발원지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이날 입때껏 발원지라고는 백두산 가서 압록강 발원지를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내 고장을 걷다가 우연히 공촌천 발원지를 만났으니 대단한 횡재였다. 내 생애 두 번째로 만난 발원지는 옹달샘처럼 작았다. 철망으로 담장이 쳐진 길가에, 버려진 듯 잊혀진 듯 뚝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본 지 오랜 모습이었다. 그곳엔 적은 양의 물이 고여 있었다. 본래 모든 시작은 미미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솟아난 공촌천이 흐르고 흘러 또 다른 물줄기와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면서 서해에 닿겠지. 그렇게 바다가 되어 달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만조와 간조를 오가며 생명의 갯벌을 어루만지겠지.
바다가 멀 텐데 어디선가 갯내음이 나는 듯했다. 문득 돌아본 징맹이고개 양 옆으로 연둣빛 아우라가 퍼져나갔다. 봄이 오면 대지의 호흡도 칼라가 된다. 지금 계양산은 연두색으로 호흡하는 중일 것이다.
소설가 김진초/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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