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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서구 3월호(243호)

  • 제목
    인천교 스케치
  • 작성부서
    홍보팀
    작성일
    2017-02-27
    조회수
    650

인천교 스케치

 

 

판타스틱한 50리 길

인천대교를 지날 때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에 젖곤 한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바다 위를 하염없이 달리는데 이게 진정 다리인지 환상인지 번번이 헛갈리는 것이다. 비현실감의 절정은 230m나 되는 주탑을 지날 때다. 영화 ‘ET’에서 자전거를 타고 줄지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처럼 자동차들이 하늘로 오르고 그 안에 탄 사람들은 덩달아 까마득한 하늘을 향하니 그야말로 놀이기구가 따로 필요 없는 판타지다. 통행료가 부담스럽지만 이런 판타지 때문에 애고 어른이고 인천대교를 탈 때마다 설레는 것일 게다.

인천대교는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바다 위에 세운 총 길이 21.38km의 어마어마한 다리로 200910월 완공됐다. 초속 72m의 강풍은 물론 진도 7의 지진에도 견디도록 첨단공법을 총 동원했다. 우아한 곡선으로 건설된 인천대교는 월미도에서도 보이고 송도에서도 보이고 하늘에서도 보이지만 인천 앞바다 섬에 가기 위해 여객선을 타고 지날 때 그 풍경이 압권이다.

인천대교로 인해 송도를 비롯하여 서울과 수도권 이남 지역에서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멀리 지방에서 외국에 나가기 위해 인천대교를 건넌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인천의 랜드마크로 인천대교가 딱이라며, 50리가 넘는 어마어마한 길이에 압도당해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서울에 63빌딩이 있고, 부산에 해운대가 있다면, 인천엔 인천대교가 있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을 향해 나선 길, 인천대교에서 바다를 가로지르며 하늘을 향해 붕 뜨면, 여행자의 가슴엔 설렘의 입자가 촘촘히 들어설 테고, 그 좋은 기운으로 여행 내내 행복할 것이다. 꼭이 영종도나 인천공항에 갈 일이 없어도 일삼아 인천대교 드라이브를 하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바다 위 50리 다리는 그만큼 판타스틱하다.

 

인천교는 살아 있다

인천대교에 앞서 인천교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이름으로만 남았지만. 매립돼 흔적조차 없기에 그곳이 인천교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혼자만 아는 비밀을 확인하듯 설레는 가슴으로 인천교를 향했다. 가끔 차를 타고 지나치긴 해도 그곳을 걸어본 지가 하 오래기에 이참에 찾아 발도장을 찍기로 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 입춘이 지나자 귀신같이 바람에 매운 기가 빠졌다. 걷기 좋은 오후 햇살이 등을 간질였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꿈틀거림이 대지 안에서 분주할 것이다. 동부제강 다음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정류장 이름은 인천의료원이었고 정류장 위치는 예전 인천교 다리 위였다. 정작 인천교가 있을 땐 다리 위에 버스정류장이 없었는데 다리가 매립되자 정류장이 생겼다.

인천교 앞 삼익가구가 있던 자리는 인천교가구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동서가구니 보르네오가구니 라자가구니 낯익은 브랜드가 보였다. 88서울올림픽을 마치고 이 나라 경제가 불처럼 일어날 때, 가좌동 제재단지엔 가구회사들이 여럿 들어서 재미를 보았다. 특히 인천교 앞 삼익가구는 클래식한 고급스러움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석남동에 있던 라자가구도 사라진 지 오랜 것 같다. 그 많던 가구회사들은 다 어디 갔을까? 거기에 밥줄을 대고 살던 이들은 또 어찌 되었을까?

길거리에 서서 직업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다보니 여권사진 한 장 찍으려고 동네를 온통 뒤지고 다닌 일이 떠오른다. 사라진 게 어디 사진관뿐이랴? 머지않아 자동운전차가 대중화 되면 운전사란 직업도 사라질 테고 대리운전이란 부업도 당연히 퇴출될 터, 할 일은 점점 줄어들고 수명은 길어지니 기나긴 인생 어떤 보람, 어떤 즐거움으로 채워야할지가 고민이다. 바람만 가끔 지나가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새 학기가 되고 계절이 바뀌면 이래저래 가구단지 드나드는 일이 많은데 가구아울렛엔 인적이 없다.

육지가 된 인천교를 건넌다. 도화동 쪽으로 기다랗게 고가도로가 지나간다.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고랑을 따라 고가도로가 이어진다. 매립지 오른쪽으로 인천의료원이 보이고, 고가도로 밑 횡단보도를 건너자 약국이 보인다. 인천교약국이다. 묻혀진 인천교를 증거하는 인천교약국’, 그리고 방금 전 본 인천교가구단지와 그 옆의 인천교그린에너지벨리’, 이어서 주유소 앞에서 만난 이정표 인천교삼거리’. 사라진 인천교를 되뇌게 하는 모든 장치들이 반갑다. 이조차 없었으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도화동 쪽 상가들도 한산한 거리만큼이나 퇴락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길가에 삼익가구가 보인다. 가좌동에서 인천교를 건너와 도화동에서 규모를 줄인 모습으로 서 있다. 인천교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가구는 생물체일까? 아까 다리 건너 가구단지에서 본 로고 나는 가구다가 떠오르며 미소가 비어진다.

인천교 건너 시내 쪽인 이곳은 예전에 고단한 하루를 마친 현장노동자들이 돼지갈비에 소주를 곁들이며 회식하던 곳이다. 노사분규가 한창이던 저녁나절, 줄줄이 늘어선 돼지갈비집에서 흘러나오는 남의 살 굽는 냄새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곤 했다. 그 많던 돼지갈비집들은 또 어디 갔을까? 고깃집은 고사하고 밥집도 별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장갑가게가 눈에 띈다. 면장갑, 코팅장갑, 고무장갑, 가죽장갑, 안전모, 마스크, 우의, 장화 등을 판다고 씌어 있다. 작업복, 단체복, 유니폼 등을 취급하는 피복상사도 보인다. 다들 떠나고 이들 두 상점만 남았나 보다. 비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담배연기 자욱하던 인천교다방, 옆 사람의 대화가 저절로 들리던 그 다방은 입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인천교삼거리 주유소 뒤편으로 선인체육관 대신 고층건물이 보인다.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단지인 모양이다. 복싱이 호황이던 시절, 선인체육관에서 수많은 타이틀매치가 있었고, 그런 날 공단 남자들은 아침부터 술렁거렸다. 위는 넓고 아래가 좁은 사각 빌딩 두 개가 대형 굴뚝처럼 높이 솟아 있고, 가운데 돔형의 체육관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선인체육관은 인천에서 가장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는데 수명을 다해 벌써 여러해 전 모습을 감추었고, 그 많던 추억도 허무하게 묻혀버렸다.

다시 다리를 건넌다. 땅속에 숨은 인천교를 건넌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동구구민운동장이 보인다. 운동장을 향해 가다 지하도를 만난다. 이름이 인천교지하보도. 벌써 몇 번째 만나는 인천교인가? 사장된 인천교지만 그것은 요소요소에 살아 있었다.

 

번지기나루

예전엔 남구 도화동에서 서구 가좌동 쪽을 개 건너라 불렀다 한다. 서해로 흐르는 갯고랑이 가좌동을 지나 주안까지 뻗어 있어, 배를 이용해서 건너다녀야 했으니 시내 쪽인 도화동에서 얕잡아보는 투로 변두리인 이쪽을 그리 불렀나 보다.

인천교는 옛날 번지기나루에 놓인 다리이며, ‘번지기, 이곳 해안에 번()을 서던 곳이 있어 생긴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한 여기에 송림동으로 통하는 나루터가 있어 '번지기나루'라 불렸다고 한다. 가좌동 인천교 자리는 웃나루, 그 밑은 아래나루라 불렀다. 웃나루는 만조 때만 나룻배로 건넜고, 간조 때는 돌다리로 건너다녀 뱃삯도 아래나루에 비해 싼 편이었다. 개 건너 사람들은 이 나룻배를 타고 개를 건너고 헐떡고개를 넘어 배다리로 통행했다.

신태범 박사의 저서 인천 한세기에는 숙골동산을 넘으면 번저기나루가 있는 주안염전 갯골이 나온다. 갯골 너머가 개건너라고 하는 서관(西關)이다. 번저기나루에는 나룻배 대신 웅장한 인천교가 걸려 있고, 개건너 일대의 야산은 공장지대로 변하고 있다.”고 씌어 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개건너와 인천 구도심을 연결하는 다리 인천교는 길이 210m, 너비 12m1958년에 준공했다. 이에 따라 인천 서부지역과 중심지의 교통이 원활해졌다. 하지만 이내 공단들이 들어서고 통행 수요가 폭발하자 1973년에 폭을 두 배 이상 넓혀 30m가 되었다. 그러나 도시 확장과 공업용지 수요로 이 일대 48만여 평 바다를 매립하면서, 인천교는 21세기를 맞지 못한 채 육지에 생매장되고 말았다.

 

삼중바닥의 전설, 키친아트

인천교 북쪽 끝 다리 양옆엔 삼익가구와 경동산업이 있었다. 삼익가구는 몸피를 줄이고 다리를 건너갔는데, 한때 9시 뉴스를 달구던 경동산업은 키친아트란 이름을 걸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회사 앞에 붙은 사훈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란 글귀에서 그동안의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경동산업의 노사갈등은 대단했다. 89년이었던가? 근로자 몇이 온몸에 신나를 뿌린 채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바로 분신에 돌입해 희생자가 나기도 했다.

삼중 바닥 냄비로 유명했던 경동산업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악명을 떨치다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0년에 법정관리 퇴출명령을 받고 만다. 이에 비상대책위를 결성한 직원들이 자본금 5000만 원을 어렵사리 마련해, 경동산업 시절 브랜드명이었던 키친아트로 노동자 지주회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첫 해부터 흑자를 내고 이내 명품 우량기업이 되었다. ‘잘려나간 손가락만 한 포대란 말이 돌 정도로 산재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경동산업이 노동자 기업으로 거듭나 성공가도를 걷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하루에 만 개가 넘는 숟가락을 만들어내던 직원들이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을 잃는 일은 종종 발생했다. 그렇게 잘려나간 손가락이 한 포대는 될 거라는 후문이 꼭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출퇴근 시간, 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다니는 사람은 죄다 경동산업 직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키친아트는 연매출의 10%를 사회에 환원하는 착한 기업이 되었다. 손가락을 바쳐가며 만든 숟가락으로 가족의 밥을 번 이들이 전설의 주방용품 브랜드 키친아트로 남아 세상을 훈훈하게 만드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묻혀버린 인천교 앞에서 앞서의 불행을 딛고 건재해 자랑스런 서구의 기업이 되었으니 더더욱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인천교 다리 위, 아니 이젠 육지가 되어버린 길거리, ‘인천의료원 버스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 노선이 많이 늘었지만 예전에 타던 노선 12, 13, 24번이 여전히 살아 있어 그 또한 반갑다. 근처에 인천의료원이 있어 간간이 손님이 타고 내린다. 저쪽 인천교삼거리에서 버스가 달려온다. 24번이다. 버스에 올라타 뒤꽁무니로 가서 멀어져가는 인천교를 바라보며, 필자가 십여 년 전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인천교는 없다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지나간 인천교를 기억한다.

 

인천교는 하루에 두 번 껑충한 다리를 드러내고 몸을 말렸다. 바다의 외출을 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너그러운 갯벌은 제 몸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갈매기들이 갯벌에서 허기를 채우는 동안 사람들은 소쿠리를 채웠다. 소쿠리가 대충 차갈 즈음 멀리서 기별이 온다. 외출했던 바다는 다가올수록 마음이 바쁘다. 나와요 나와, 빨리 나오라구! 먼저 몸을 뺀 사람이 다리 위에서 소리친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밀물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인천교에 다시 채워진 바다는 생명의 피를 수혈하고 돌아온 감격에 한동안 호흡이 거칠었다.

 

소설가 김진초/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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